케인지언 경제학, 인플레이션 때문에 비난 받다
불균형 예산과, 거대한 재정적자, 그리고 그 결과인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인플레이션 때문에 케인지언 경제학을 비난하는 일은 정확한 것인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일부의 통화주의 경제학자들은 그렇게 비난했다. 그리고 그들은 기업이나, 정부나, 학계에 종사하고 있는 많은 경제학자의 뇌리에 이런 비난이 고착되도록 하였다.
그 누가 두 자리 숫자의 인플레이션을 초래케 한데 책임이 있다는 경제학과 관련을 맺으려고 할 것인가? 아무도 없다. 따라서 1970년대 중반에는 케인지언이 되는 것은 더 이상 유행이 되지 못하였다.
경제학자들은 케인지언 진영에서 무리를 지어 탈출하였다. 그들은 케인지언이라는 표시를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제거해 버렸다.
통화론자 보좌관들의 등용
1960년대 초기에는 케인지언 경제학자들은 케네디-존슨 행정부에 의해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으로 발탁되었다. 이 기간에는 케인지언 경제학은 정부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1969년에 닉슨 행정부의 등장과 함께 통화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경제학자들이 경제자문위원과 연방준비은행이사회의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결과, 통화주의 경제학 및 철학이 공공정책을 결정하는 데 보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통화주의가 학계를 지배하다
대학의 경제학자들 사이에 통화주의 경제학의 영향력은 증대하였다. 케인지언 이론보다는 통화주의 이론이 대학 강단에서 더 많이 강의 되었고 전문가들의 회의 석상에서도 더 많이 논의되었다.
통화주의 접근의 선봉장이며 케인지언 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선봉장인 밀튼 프리드만은 예리한 분석력과 탁월한 설득력을 가지고 학계에서 통화주의가 풍미하게 한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통화주의 경제학은 신고전학파 모형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것의 재확인이었기 때문에 학계의 많은 경제학자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그들의 교육배경 때문에 케인지언 경제학이 강조하고 있는 단기 동태적인 경제문제 보다 장기균형의 수학적인 모형에 더 친숙하다.
5-5. 케인지언 경제학의 실용적인 매력
통화론자들의 부상에도, 케인지언 경제학은 공공정책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고 있다. 케인지언 경제학은 바람직하지 못한 단기의 거시 경제적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권고를 제안하고 있다. 이에 반해, 통화주의 경제학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케인지언 경제학은 실용적인 정책 입안자들에게는 경제 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서는 보다 적합하고 더욱 실천적인 접근방식으로 인식되어 있다.
케인지언의 반격
1980~84년은 시련과 충격의 시기였다. 공급중시 경제학, 통화주의 이론, 그리고 합리적 기대이론 모두 실증 증거와는 들어맞지 않았다. 1983년부터 일부 케인지언들은 공공정책의 지침으로서 케인지언 경제학의 정확성과 유용성에 대한 신념을 표방하고 강조한 사실이 있다.
케인지언 권리위원회
1983년에 케인지언 권리위원회(Committee on the Rights of Closet Keynesian)가 런던에서 결성되었다. 위원회의 목적은 케인지언 경제학에 대한 존경과 수용성을 되찾자는 것이었다.
1984년 초에 위원회는 통화주의자들과 여타의 사람들이 케인지언 경제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어떻게 부정확한 인식을 유포시키고 있으며 통화론자들이 세계 경제의 많은 불행한 일들에 대해 케인지언 경제학을 어떻게 왜곡하고 비난했는지를 알리는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이 유인물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의 변화하는 경제상황을 검토하고, 케인지언 이론이 당시 경제 상황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공급중시 경제학이나, 통화주의 경제학, 그리고 합리적 기대이론보다도 더 우월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분명한 결론은 이론적인 발전과 실증적인 증거에 근거하여 보강된 케인지언(포스트-케인지언 또는 네오-케인지언) 경제학이 1980년대의 경제정책을 선도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정확한 이론적인 틀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反 케인지언들은 쉽사리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1980년대 초기의 사건들은 그 어떤 것도 밀튼 프리드만을 비롯한 통화주의자들과, 로버트 루카스(Robert Lucas)를 비롯한 합리적 기대론자들,그리고 아서 래퍼 (Arthur Laffer)를 비롯한 공급중시 이론가들 모두에게 그들의 역할이 끝났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아직까지는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진영에서 이탈하여 케인지언 진영으로 합류할 것인가? 결단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이론가들은 모두 왜 1980년대 초기의 사건들은 그들의 이론을 정확히 검증하는 데는 충분치 못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주장을 고집할 것이며 또한 자신을 변호할 것이다.
케인지언이 부활할 것인가?
만약 케인지언 경제학이 공공정책을 주도하는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고 또한 그것이 1980년대의 대학 강단에서 유행하게 된다면, 이러한 움직임은 반드시 케인지언들 스스로 주도해야 한다. 어떤 케인지언들?
그들은 통화주의자들과, 공급중시론자들과, 그리고 합리적 기대이론가들에 의해 지금까지 수많은 무차별 공격을 받아 패배해서 벽 속에 갇혔던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깨어나서 그들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