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기대이론은 사실과 들어 맞지 않는다
예컨대, 통화공급의 중대와 같이 공개된 정책은 고용, 생산, 산출물, 그리고 소득의 증가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오직 직접적으로 인플레이션만을 야기시킬 것이다.
공개된 통화 긴축정책은 그 반대로 자동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둔화시킬 것이다. 경제에서 경기침체가 없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또한, 실업의 감소만큼 중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합리적 기대론은 1980~84년간의 사건들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 사실상 그것은 전혀 맞지 않는다. 1980~84년 동안의 사건들은 합리적 기대론에 의해 예측된 결과와는 정반대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프린스턴 대학교수인 알란 브라인더(Alan Blinder)는 이 동안의 사건들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황제인 합리적 기대론이 이론적인 정교함이 찬란하기는 하지만 실증적인 근거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케인지언 경제학의 승리
케인지언 경제학자들은 1980~84년을 바라보면서 공급중시론, 통화주의자, 그리고 합리적 기대이론들은 사태를 예측하는 데 있어서 실패했다고 보고 있다.
이들 이론의 주창자들은 각각 왜 이론이 정확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그러나 케인지언들은 이들 이론은 실패했으며, 오직 케인지언 이론만이 이 기간 동안에 미국 및 세계경제에서 발생했던 일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4-1. 케인지언 이론을 상황을 설명할 수 있었다
케인지언 경제학은 긴축통화가 고금리를 가져왔고 이는 소비와 투자지출 즉 총지출(총수요)을 감소시켰다고 한다. 만약 통화가 초긴축이라면, 금리가 치솟아 심각한 경기 침체가 초래될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바로 1980~82년 사이에 일어났다.
케인지언 경제학은 경제에서 가격은 긴축통화정책에 신속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반응하지는 않는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경기 침체가 지속하고 실업이 악화함에 따라, 물가상승률은 이에 반응하여 하락한다. 그것 또한 바로 1980~82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케인지언 경제학은 경제가 침체에 빠졌을 때는, 확대 재정금융정책이 경제 회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그러한 정책들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는다. 무슨 정책들이란 말인가? 총수요를 증대시키는 정책이다.
통화공급을 확대하고, 감세조치를 취하고 적자재정을 운용하라. 이러한 일들이 바로 1983년의 급속한 회복기의 초기에 일어났던 것들이다. 이때 인플레이션 불씨는 결코 재연되지 않았다.
케인지언들에 대한 신뢰 회복
1980~84년 사이의 경제적 사건들은 많은 케인지언 경제학자들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켜 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들 경제학자는 왜 처음에는 케인지언 경제학에 대한 신뢰를 상실토록 하였는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통화주의 경제학으로 이행
케인지언 경제학은 1930년대의 대공황기에 탄생하였다. 처음에는 많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그 경제학은 거짓이며, 오류이고, 위험하다고 공박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초기에 그 이론은 널리 수용되었다. 케네디-존슨의 케인지언적인 감세 조치가 바로 그것이다. 확실히 그 이론은 작동했다. 그 성공을 반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60년대 초기에는 케인지언 경제학은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은 수용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업이나 학계의 경제학자들이 스스로 그들 자신을 케인지언이라고 자칭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러나, 그 후 무엇이 발생하였는가?
밀튼 프리드만이 이끄는 통화주의자들을 비롯한 소수의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케인지언 경제학에 대한 공격을 그치지 않았다. 이러는 중에, 1960년대 중엽에 경제상황이 악화함에 따라 케인지언 경제학은 통화론자들의 공격을 받자 빛을 잃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통화주의 진영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확대되고 있는 인플레이션의 원인과 결과
통화주의 경제학의 대두에 이바지한 하나의 주요한 요인은 통제되지 않은 인플레이션이었다.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기 위해 케인지언 경제학은 긴축 통화와 고금리를 권고하였다. 또한, 증세 조치와 정부지출 삭감의 필요성도 권고하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의 정치적 현실은 이러한 접근방법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정부지출은 계속 증가하였다. 존슨 행정부는 의회에 중세를 요청했으나, 의회는 점차 염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증세를 싫어했다.
따라서, 정부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재정적자를 증대시켰으며 또한 이를 위해 새로운 화폐를 창출하였다.
이제 무엇이 발생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케인지언들은 물론이고 통화주의자들과 그리고 명성이 있는 경제학자들은 악성 인플레이션의 단계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여러분은 이미 그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알고 있다. 악성 인플레이션, 닉슨 대통령의 긴축통화정책(1969~71)에 바로 뒤이어 임금-가격 통제(1971~73) 등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기간 전체를 통해서 정부는 계속해서 조세수입 이상을 지출하는 재정적자를 기록하였다.
1970년대 모든 기간과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연방정부의 예산은 거대한 적자를 기록하였다. 균형으로 이끌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정부가 정부 지출의 삭감이나 조세 수입의 증대를 통해 적자를 축소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반 인플레이션 프로그램으로 남는 것은 오직 통화공급의 증가율을 억제하고 금리를 인상하게 시키는 긴축통화정책뿐이다.
1979년 10월의 연방준비은행 이사회의 중요한 정책 변경은 이자율의 통제보다는 통화공급의 팽창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데 있었다. 이것은 통화공급의 증가를 통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통화주의 경제학에 의해 고무된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이자율 변동의 효과를 강조하는 케인지언 경제학으로부터 이탈이었다.